가학적성애와 지배적욕구가 동시에 양립되어 있는 변태라고 할수 있을듯싶다.
가학적성애야 상대에게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줌으로 인해서 성적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동시에 지배욕구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성적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새디스트 하나만 갖을수도 있지만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하나의 성향이 발현이 되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험치가 높아짐에 따라 이 성향이라는것 자체가 확장의 욕구도 갖고 있기 때문에 확장이 될수 밖에 없으며 그 확장의 방향 또한 자신의 경험치에 비례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성향끼리의 양립은 충분히 가능하다. 마조와 섭, 마조와 돔, 사디와 섭, 등등등
그리고 단독적인 성향도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종국에는 양립되는 성향을 갖게 될것이다. 물론 아닐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시선은 거두기 바란다. 경험치에 비례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란게 꼭 SM적 경험이 아닐지라도 일반 생활안에서도 이 경험치는 꼬박 꼬박 채워지고 있으며. 그 경험치의 양이 얼마되지 않더라도 우리 옛속담에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무시못한 경험치기 되는것이다.

간접적인 글이나 영상을 통해서 생기는 경험치는 경험치라기 보다는 가상의 경험치 이자 환상적인 요소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실체가 없는 자신이 가상적으로 만든 상대에게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하는것은 자신만의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원하는대로 돌아가는것은 SM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연의확장보단 내면의 확장이 주로 이루어졌다.
즉 외연이 새디즘이라면 내면은 지배욕구였다. 내면이 확장됨에 따라서 반대급부로 외연의 확장은 당연하게 생각했고 지금에서야 그게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내 내면에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 잘못된 과거에서 내가 고쳐야할부분과 수용할수 있는부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지적에 대한 수용여부 등등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에게도 앞에서 말한 자아성찰적인 부분들이 차츰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전같았으면 갖고 싶다면 과감하게 도전을 했고 도발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외연의 경우에도 예전에는 해보고 싶다면 상대의 동의보단 나의 억압적인 행위로 굴복시키고 진행을 시키기도 했고, 상대를 일단 굴복시키거나 좌절시키는것이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면과 외연의 적절한 양립으로 인해서 상대를 판단하고 그에 합당한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대가 견뎌낼수 있는 범위까지 파악후에 진행을 하는것이고 그리고 상대가 리밋에 도달하면 상대의 한계치를 확장하는것으로 넓혀가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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